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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세미나]  일간신문 데스크급 워크숍(영남지역)

2007.09.14. - 2007.09.14. / 발제자 : 김옥조 / 주제 : 신문윤리강령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

조회 : 5659
  • 신문윤리강령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

    김옥조(한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1. 들어가면서
      오랜 권위주의 통치를 벗어나 사회전반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언론환경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언론과 권력 간의 관계 재편이다. 지금도 우리 언론은 이러한 관계 재편의 격류 속에 있다. 최근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움직임으로 인한 언론과 정부 사이의 알력과 반목이 이를 상징한다. 과거 다소간 기복은 있었지만 대체로 협조와 알력의 반복으로 심지어 공생 관계로까지 국민에 비쳐졌던 양자 간의 관계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멀리 간 느낌이다. 이른바 ‘적대감(adversarial)'으로까지 언론과 정부와의 적대적 관계(adversary)의 당부(當否)에 대해서는 Everette E. Dennis & John C. Merrill, Media Debates, Thomson Wadworth 2006, pp. 22~36 참조  비쳐지는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권력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상대방을 굽히게 하는 힘을 가리킨다. 정부는 이 물리력을 배경으로 언론을 밀어붙이고 있다. 언론은 연일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비명은 국민들을 향하고 있다. 국민들의 강력한 성원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 싸움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 편만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언론에 대한 국민들 시각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타성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과거 우리 언론은 오랜 군사정권 아래서 많은 자유가 제약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언론자유 쟁취를 위한 그들의 몸부림 과정의 웬만한 일탈쯤은 애정으로 보담아 왔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권력은 정통성 결여라는 원죄에서 해방되었고 사회 각 부문에는 권력이나 언론의 부당한 간섭에 기죽지 않는 수많은 세력들이 자라났다. 이들은 언론에 더 이상의 성역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제 언론도 제 빨리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부쩍 커진 시민사회의 키에 맞추어 사회의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전달과 의견수렴으로 공론장(public sphere) 역할을 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다 할 때 언론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이번과 같이 권력과 대치할 때 국민들이 강력한 원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도록 사회(시민)는 언론에 어떠한 기제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하는가? 이것이 언론의 어카운터빌리티(accountability) 이론이다. 김세은, ‘언론의 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변화하는 미디어 사회적 책임』, 한국언론재단 2005, 44쪽 언론의 어카운터빌리티로는 학자들에 따라 여러 방안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를 대별하면 ①시장에 맡기는 방안, ②법률에 맡기는 방안, ③자율규제에 맡기는 방안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언론의 강력한 공공적 성격을 감안하면 이를 시장에만 맡겨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프랑스 헌법원(conseil constitutionnel)은 신문의 자유와 방송의 자유를 다룬 판례 두 판례〔1984. 10. 10〕,〔1986. 9. 18〕에서 공중의 자유로운 정보 선택권을 전적으로 국가에 맡기는 것도 적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전적으로 시장에 맡기는 것도 부적합(밑줄 필자)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大石泰彦, 『世界のマス·メディア法』(?原 猛 編), 嵯峨野書院 1996, pp. 187~188 참조).  또한 언론의 외부 강제력에 의한 위축효과(chilling effect) 등에 비추어 법률에 맡기는 것 역시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역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③의 자율규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언론2000년위원회는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강제규범의 수용은 언론이 스스로 자율적 통제능력을 방기하거나 포기했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언론보고서』(한국언론2000년위원회), 2000, 78쪽). 자율규제를 통해 달성하려는 중심적 가치의 선언이자 일탈을 조정할 가늠자가 바로 윤리강령이다. 따라서 언론이 제 역할과 책임(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한 윤리강령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그 지름길임이 자명해진다.

    2. 언론 자유와 사회적 책임론(social responsibility)
      1) 허친스(Hutchins) 보고서
      17세기(J. Milton)에 싹터 19세기(J. S. Mill)에 꽃피운 전통적인 자유주의 언론관은 절대왕정 체제하의 권위주의적 언론관을 무너뜨리는 데는 기여를 했으나 자본주의 · 시장원리와 만나 19세기말부터 내용 면에서는 상업주의 · 선정주의, 경영 면에서는 이윤지상주의 · 소유집중 현상을 낳게 되었다. 1830년대 초부터 여기 저기 생겨난 미국의 대중신문은 19세기말에 이르러 판매부수를 늘이기 위해 독자들의 말초적인 호기심에 영합하는 범죄 · 섹스 · 스캔들 · 재해 등 주로 남의 불행을 부풀려 돈벌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신문의 상업주의 만연은 허위 · 과장 · 왜곡 · 조작 보도의 홍수를 결과함으로써 많은 시민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황색 저널리즘은 20세기 초에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언론의 4 이론』(Four Theories of the Press)의 저자 중 한 명으로 이 저서에서 ‘사회적 책임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피터슨(Theodore Peterson)은 당시의 언론 상황을 아래와 같이 진단하고 있다. 시버트, 피터슨, 슈람 공저/이규종, 한병구 공역, 『매스컴 4 이론』, 문맥사 1991, 133~134쪽 이 같은 진단을 그로부터 반 세기가 훨씬 지난 현재 한국의 언론 상황과 비교할 때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자의 이익을 위해 강대한 권력을 행사. 특히 정치, 경제 문제에 반대 의견 대신     자신의 의견을 선전
    △대기업에 종속되어 있어 때로는 광고주가 내용을 통제 가능.
    △사회변동에 저항하고 수구적임.
    △피상적이고 선세이셔널한 내용을 더 많이 취급.
    △공중의 도덕을 위태롭게 함.
    △정당한 이유 없이 빈번히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기업가 계급(business class)에 의해 지배되어 있고 신규 시장 진입이 어려워 사상의     자유시장이 위태롭게 되었다.
      
      당시 신문들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한편으로는 많은 유식자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에 대한 타율적인 강제제재가 뒤따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법원도 나서서 자유주의 언론도 결코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서 자유로운 의견발표와 토론도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 있으면 제한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기기도 했다. 이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clear and present danger test)'이라고 함(〔Schenck v. United States, 1919〕. 이러한 우려를 반영하여 1942년 『타임/라이프』 발행인 헨리 루스(Henry Luce)의 제안에 따라 언론자유위원회(허친스 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는 그 경비로 20만 달러를 선뜻 내놓기도 했다. 그 후의 경비는 백과사전 출판으로 유명한 엔사이크로피디아 브리타니카 사가 맡았고 이들은 물론이고 언론계 인사는 일절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히 연구의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시카고 대학 총장 허친스(Robert W. Hutchins)를 위원장으로 하고 이 밖에 유수한 학자들(철학, 법학, 정치학, 경제, 종교, 윤리, 인류, 역사학자, 시인 등) 12명을 위원으로 하는 이 위원회는 당시 언론 현황을 점검하고 개선책을 마련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사전에 방지하는 데 발족 동기가 있었다. 이 위원회는 구성된 지 5 년 만인 1947년 드디어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이라는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를 위원장의 이름을 따 허친스 보고서라고도 한다.
      이 보고서는 한 마디로 언론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자유에 상응한 책임도 함께 져야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는 또 언론의 자유라는 천부적인 권리도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저버리면 제반 자유제도들을 경시하는 오만불손한 개인주의를 낳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타고나면서부터 부여받은 무대가 · 무조건적인 권리라는 관념이 전단적인 정부들에 맞서 투쟁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원리였고, 또 그것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과업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가 성취돼 있는 상황에서는 이에도 제약을 가할 필요가 분명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33 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언론의 자유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현실 진단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진단은 전 세계적으로 진전되고 있는 신문의 소유집중 현상에 비추어 지금도 유효하다. 이 보고서는 그 원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언론의 중요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의견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줄었다. 1969년 닉슨 정부의 애그뉴(Spiro Agnew) 부통령도 비슷한 발언(이른바 ‘애그뉴 독트린’)을 했다(Lucas A. Powe, JR., American Broadcasting And the First Amend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p. 123 참조).
      둘째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언론을 이용할 수 있는 이들 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필요(needs)에 부응하는 서비스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셋째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때로는 사회가 비난하는 일마저 하고 있다.
      이는 이어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그러한 소수의 자유는 위험할 수 있고 그들에 대한 규제나 통제는 불가피하게 된다고 진단하면서  실제로 영국에서는 “만약 신문고정처리위원회(PCC)와 신문업계가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 프라이버시 침해나 타블로이드 신문의 저질 행태를 막지 못하면 의회가 나서 입법을 통해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해 온 적이 있다. 심지어 윤리강령을 어기는 경우 의사나 간호사의 경우와 같이 기자등록 취소나 취재활동 중지로 이어질 가능성도 시사되어 왔다(Andrew Belsey and Ruth Chadwick, Ethical Issues in Journalism and the Media, Routledge(London) 1994, beginning statement, p. 8 참조). 이를 해결한다고 “정부가 언론을 소유, 통제, 해체하려는 기도는 언론자유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과정에서 언론을 죽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언론과 그 종사자들 스스로가 그러한 폐해를 치료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언론자유위원회/김택환 역,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 중앙M&B 2001, .25~27쪽; 石村善治, 『言論法硏究Ⅰ』, 信山社 1992, p. 42
      이 보고서가 나가자 많은 언론들은 이 보고서로 말미암아 오히려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불러오게 되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언론의 4 이론(Four Theories of the Press), 1956』의 공저자로 유명한 피터슨(Theodore Peterson) 교수(일리노이 대학)가 없었다면 이 보고서가 이미 잊혀진 존재로 되었을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는 『언론의 4 이론』의 한 장을 맡아 이 보고서의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 내용에 ‘사회적 책임론(Social Responsibility Theory)’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보고서 안에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는 사회적 책임론과 허친스 보고서가 드디어 동의어가 된 것이다. Ron F. Smith, Groping for Ethics in Journalism Fifth Edition, Blackwell Publishing Co. 2003, pp. 71~72
      언론이 권력을 추구하고 왜곡 · 선정 보도를 하는 등 언론자유를 남용한 것은 당시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력 신문의 사주가 신문을 자신의 사리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예사였다. 자신의 신문을 이용, 정치적 영향력을 구축한다든지 이를 위해 편집과 논조에 간섭, 제작진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1차 대전 후 『더 타임스』와 『데일리 메일』의 사주 노스클리프와 『데일리 익스프레스』 사주 비버브루크의 행태가 그 전형적인 예. 최근 『더 타임스』와 『오브서버』 등을 손아귀에 넣은 뒤 드디어 세계의 언론 제왕으로 등극한 머독(Lupert Murdoch) 등의 제작진과의 마찰에 대해서는 Andrew Belsey & Ruth Chadwick, Ethical Issues in Journalism and the Media, Routledge(London) 1994, pp. 37~47 참조. 영국도 1947년 이후 의회가 3 차례(1947~1949, 1961~1962, 1974~1977)나 걸쳐 왕립신문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Press)를 구성,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3 차례 모두 신문의 자율규제(self regulation)의 강화를 거듭 건의했다. 미국의 허친스(Hutchins) 위원회와는 달리 1차 왕립위원회(1947년)가 위원 전원을 언론계 인사로 구성함으로써 성과가 미흡하자 2차, 3차 위원회에서는 비 언론계 위원 수를 점진적으로 늘려 50대 50의 비율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2차(1962년), 3차(1977년) 보고서에 의해 신문평의회의 기능 등을 보완했으나 의회의 만족을 얻지 못해 1989년에 새로 구성된 캘커트(Calcutt)위원회에 의해 신문평의회는 신문고정처리위원회(the Press Complaints Commission)로 대체되게 되었다.    

      2) 언론의 사회적 책임론
      언론은 누구로부터, 특히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언론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 진실을 전할 수 있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그들이 국민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과 균형 · 조화를 이룰 때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가 정치적 압제와 싸울 때는 무한한 힘을 발휘하지만 이에 상응한 의무 조건과 유리되어 자유가 과잉으로 될 때에는 다시 정치적 핍박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기 때문에 건전한 언론의 자유는 이러한 책임이 전제된 개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언론자유의 과잉, 방종의 반성으로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논의가 바로 언론의 사회적 책임론이다.
      허친스 위원회는 당시 언론 상황을 진단하고 그 대책을 제의하면서 보고서의 이름부터 ‘자유롭고 책임 있는(free and responsible) 언론'이라 명명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언론에 대해 아래와 같은 5 가지 임무(obligation)를 제안하고 있다. Louis A. Day, Ethics in Media Communications: Cases and Controversies Fifth Edition, Thomson Wadworth 2006, pp. 39~40; 언론자유위원회/김택환 역, 전게서. 48~58쪽; 팽원순, 『언론인의 직업윤리』, 한국언론연구원, 1987, 89쪽 언론의 사회적 책임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대체로 허친스 보고서의 이 5 가지 임무로 대체되고 있다. Seijiro Tskamoto, 'Social Responsibility Theory and the Study of Journalism Ethics in Japan', Journal of Mass Media Ethics, Vol. 21, 2006, Lawrence Erlbaum, pp. 54~55: Ron F. Smith, ibid., p. 71; Louis A. Day, ibid., pp. 39~40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American Society of News Editors)가 1975년에 새로 개정, 현재에 이르고 있는 ’원칙선언(Statement of Principles)' 제 1조(책임)에도 이 같은 정신이 잘 함축되어 있다. ARTICLE I - Responsibility. The primary purpose of gathering and distributing news and opinion is to serve the general welfare by informing the people and enabling them to make judgments on the issues of the time. Newspapermen and women who abuse the power of their professional role for selfish motives or unworthy purposes are faithless to that public trust. The American press was made free not just to inform or just to serve as a forum for debate but also to bring an independent scrutiny to bear on the forces of power in the society, including the conduct of official power at all levels of government.
      ① 언론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the day's events)에 대해 전체 문맥(context)을 통해 그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진실하고 포괄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허친스 보고서는 고립된 사실보도가 자체로는 정확하더라도 얼마든지 ‘오도적(misleading)’이며 실제로 ‘비진실(untrue)’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언론자유위원회/김택환 역, 전게서, 50쪽).  언론은 정확해야 하며 사실은 사실대로 의견은 의견대로 밝혀야 하고 ‘사실에 대한 진실(the truth about the fact)’도 알려야 한다. 『워싱턴 포스트』를 세계 최정상의 고급지로 키운 마이어(Eugene Meyer: 현 발행인 도널드 그레이엄의 외조부)는 1933년 자신이 기초한 『워싱턴 포스트』의 원칙(the Post's Principles) 선언에서 “확인되었을 때의 진실과 거의 같은 진실(the truth as nearly as the truth may be ascertained.”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Bill Kovach & Tom Rosenstiel, The Elements of Journalism, Three Rivers Press 2001, p. 44).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언론인들에게 취재원이 제공한 사실에 대해 회의하고 그 사실 뒤에 있는 진실을 찾을 것을 촉구했다(허버트 알철 양승목 역, 『현대언론사상사』, 나남출판 2001, 522쪽에서 재인용).
      ② 언론은 의견 · 비판의 교환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구실을 해야 한다.
      ③ 언론은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의 올바른 모습(representative picture)을 비춰주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stereotype)을 영속화시켜서는 안 된다.
      ④ 언론은 사회의 목표와 가치를 제시하고 설명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
      ⑤ 언론은 수용자들이 그날그날의 정보에 대해 완전히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언론의 사회적 책임론은 학자들의 연구실이나 언론 종사자들의 양심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법률이 이를 수용, 입법화하는 나라들도 나오고 있다. 독일과 한국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독일에서는 언론의 공적 책무(oeffentlche Aufgabe)의 개념으로 프레스법에 규정되어 있고, 한국도 지난 1980년의 언론기본법에 이어 2005년 신문법과 언론피해구제법 각 4조에 사회적 책임 및 공적 책무를 강조하는 규정을 각각 두고 있다.  
      그러나 공적 책무나 사회적 책임과 같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을 법률에 편입, 이를 언론자유의 법률적 한계를 획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1980년대 언론기본법의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비난받은 것도 바로 이 공적 책무 조항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국가기관이 이 같은 추상적 기준에 의해 언론보도 내용을 재단하려 들 때 이러한 막연한 개념이 언론자유의 ‘트로이 목마’가 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浜田純一, 『メディアの法理』, 日本評論社 1990, p. 24 따라서 독일에서도 학설이나 판례를 통해 이 조항을 “특별한 의무를 부과한다기보다 언론의 공공에 대한 정치 ·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 정도로 유연하게 해석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세한 것은 김옥조, 『미디어법 개정판』,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81~83쪽 참조

      3) 언론의 사회적 책임론과 자율규제  
      허친스 보고서와 영국 제1차 왕립신문위원회 보고서는 권력의 타율적인 간섭을 사전에 막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자율적 규제 장치의 설치 · 운영을 제안했다. 허친스 보고서는 “언론의 구체적인 행동(performance) 기준은 언론 스스로가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언론자유의 남용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자율 교정이 외부로부터의 교정보다 훨씬 낫다는 말의 뜻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언론자유가 성취되려면 정부의 개입, 규제, 통제하는 권한에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자유위원회/김택환 역, 전게서, 171, 159쪽  
      이러한 자율적 규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윤리강령 제정, 언론평의회 설치, 옴부즈만 제도 등이다. Louis A. Day, ibid., p. 46 이 밖에도 프랑스의 언론학자 베르트랑(Claud-Jean Bertrand)은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비정부적인 모든 방법을 ‘미디어 어카운터빌리티 시스템(MAS: Media Accountability System)'이라고 이름 짓고 그 안에 미디어 감시, 미디어 비평, 저널리스트 육성 및 교육 등을 포함하고 있다. 新聞報道硏究會 編, 『いま新聞を考える』, 日本新聞協會 硏究所 1995, pp. 346~347: 김세은, 앞의 글, 47쪽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구체화된 것은 다른 전문직들이 다 갖고 있는 윤리강령의 제정이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20세기 들어오면서 미국과 폴랜드를 시작으로 전 유럽으로 번져갔는데 Richard Keeble, ethics for Journalist, Routledge 2006, p. 13  세계 최초로 미국의 몇몇 신문들이 1911년부터 윤리강령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전국 단위로 세계 최초의 것은 1922년 미국신문편집인협회(the American Society of Newspaper Editors: ASNE)가 채택한 신문강령(Canons of Journalism)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A. David Gordon & John Michael Kittross, Controvercies in media ethics second edition, Longman 1999, pp. 56~59 이미 1918년에 프랑스 전국언론인연합(the National Syndicate of French Journalists)이 윤리강령(Charter of the Professional Duties of French Journalists)을 채택, 1938년에 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http://ethics.iit.edu/codes/coe/nat.syndicate.french.journalists.html).

      4) 사회적 책임론과 언론의 기업적 성격
    사회적 책임론자들은 언론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기업의 형채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피터슨은 “언론은 사기업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시버트, 피터슨, 슈람 공저/이규종, 한병구 공역, 『매스컴 4 이론』, 문맥사 1991, 161쪽  허친스 보고서도 “언론은 사기업으로서, 자유로운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언론자유위원회/김택환 역, 전게서, 177쪽
      일본의 언론법학자 하마다 준이치(浜田純一)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언론의 사기업성에서 비롯된 자본이나 영리의 논리에 의해 언론자유가 침식되고 자본 집중으로 인해 의견의 자유시장이 방해받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재산의 독립성으로 말미암아 언론이 국가의 지배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안정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밖에 개인의 자발성과 창조성의 원천으로서 정보유통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고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소비자인 국민의 요망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등 큰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하마다 준이치 지음/이문호 옮김, 『情報法』, 장산 1995, 75~76쪽 참조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사기업은 이윤 추구가 본령이다. 사기업의 이윤 추구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는 상충 관계에 설 때가 많다. 실제로 많은 언론사가 기업으로서도 성공한 미국에서는 언론 종사자의 약 76%가 “저널리즘은 공공 서비스이기도 하고 감시견이기도 하며 동시에 기업활동(business)”이라고 응답하고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언론사도 주주에 경과보고를 할 책임(accountability)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998-1999년 미국 PEW리서치센터의 ‘미디어 종사자 취재·보도활동상의 의식조사’). http://www.people-press.org/press99rpt.htm
      미국의 유력한 언론 체인 ‘나이트 리더’는 “회사의 기본적인 경영목표는 체계적이고 합법적인 형태로 수익증대를 꽤하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매수와 합병((M&A)을 통해 사업을 다각화하며 전문성과 신문의 질을 최고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미국의 기자 출신 언론학자 핑크(Conrad Fink) 교수는 전한다. 핑크 교수는 미국에서 사회적 책임의식이 비교적 투철한 나이트 리더, 다우 존스, 트리뷴, ABC-TV조차도 기업의 첫 번째 목표는 사회가 아니라 주주에 대한 봉사였다고 전하고 있다. 콘라드 핑크 저/한국언론연구원 편역, 『언론윤리』, 한국언론연구원 1995, 249~251쪽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1991년 9월 6일 사의를 표하면서 “언론이 이제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제약세력인 자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한겨레신문』 2001. 4. 7).
      이러한 딜레마의 유일한 돌파구자 해결책이 바로 언론윤리이고 언론사 발행인 및 종사자들의 언론을 통한 공익의 실현(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에 정진하려는 건강한 에토스(ethos)이다. 언론인들의 이러한 에토스를 모아 스스로 다짐하고 정진하겠다는 결의이자 독자와 시청자에 대한 약속을 명문화 한 것이 바로 윤리강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원칙(The Post's Principles)’ 선언은 인상적이다. “신문의 임무는 공중이나 독자를 위해 있지 결코 소유주의 사적인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진실 추구를 위해 어떤 물질적 희생도 감수할 준비를 할 것이다.” 최근 국내 유력 신문의 사주도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2004년 3월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신문사는 기업이면서도 공익성을 요구받는다. 수익성과 공익성이 충돌하면 당연히 공익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다(『기자협회보』 2004. 3. 3).

    3. 언론윤리강령
      1) 윤리강령의 제정
      20 세기에 들어와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과 경계가 높아지자 구미 각국은 앞 다투어 윤리강령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전국 단위로는 세계 최초로 일컬어지고 있는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American Society of News Editors)의 신문강령(Canons of Journalism) 이 강령은 1975년 한 차례 개정을 통해 ‘원칙선언(Statement of Principles)’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에 이어 미국 최대의 기자 조직인 직업저널리스트협회(SPJ: the 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도 1926년부터 ASNE의 것을 빌려 써오다 1973년에 독자적인 윤리강령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이 1923년(신문협회), 영국(전국언론노조: NUJ)이 1936년 각각 윤리강령을 제정했다. Karen Sanders, Ethics & Journalism, Sage Publications 2005, p. 141 참조  
      한국은 신문편집인협회가 정부수립 9년만인 1957년 4월 7일 ‘신문의 날’ 제정과 함께 ‘신문윤리강령’을 처음으로 마련한데 이어 1961년 9월 12일 ‘신문윤리위원회’가 발족, 1차 수정을 거친 뒤 1996년 새로운 언론환경에 맞추어 현재의 윤리강령을 새로 제정했다. 그 사이 1964년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으로 유명한 신문윤리위원회법이 제정되어(곧 폐지됨) 한 차례 격동을 치른 바 있다. 개별 언론사로는 『한겨레신문』이 1988년 5월 최초로 윤리강령을 만든 데 이어 1990년 1월 KBS가 최초의 방송강령을 마련했으며, MBC가 그 해 7월에 뒤를 이었고 1991년 3월 『동아일보』가 윤리강령을 채택한 뒤 다른 회사들이 이를 뒤따랐다. 이에 비해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패전 직후인 1946년 미 군정하에서 신문협회가 주동이 되어 윤리강령을 만들었다. 일본신문윤리강령은 1946년 제정 후 단 한 차례 개정(2000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년 현재 전 세계에는 93 개국이 전국 단위의 언론윤리강령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언론종사자에 대한 윤리 함양을 위해 설립된 영국의 비영리기관 미디어와이즈(MediaWise)가 2007년 현재 전국 단위의 윤리강령을 제정, 시행하고 있는 93개국의 윤리강령을 수집, 전문을 웹 사이트에 올려놓고 있다(http://www.mediawise.org.uk/display).  이들 언론윤리강령은 그 편제나 내용은 조금 씩 다르지만 대개 다음의 5 가지 내용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① 취재, 보도, 논평에 있어서 정직, 성실, 진실, 객관성의 유지
      ② ‘알 권리’와 ‘알릴 의무’의 실현을 위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
      ③ 언론인의 직업정신(professionalism) 제고와 고용주에 의한 언론인 인격 존중
      ④ 경제적 이익 등을 위한 언론인 지위 이용금지
      ⑤) 취재원의 비닉 엄수

      2) 윤리강령 제정의 의의
      언론이 윤리강령을 제정, 운용함으로써 최소한 두 가지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규율(self discipline)이고 또 한 가지는 자기방어(self protection)이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윤리강령을 지키도록 하여 자기규율을 하고 이를 통해 언론의 방종을 막고 외부로부터의 공격 빌미를 주지 않음으로써 자기방어를 굳건히 한다는 것이다. 윤리강령을 운용하는 윤리기구가 대내적인 자기규율과 대외적인 자기방어라는 2원적 자율규제 기능을 한다고 하여 『워싱턴 포스트』의 전 편집장 브래들리(Benjamin Bradlee)는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통해 『워싱턴 포스트』를 세계적인 신문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한 바 있는 브래들리는 1991년 이 신문의 편집장(1965-1991)에서 물러나 2007년 현재 이 신문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 “하나는 자기 안쪽을 향해, 다른 하나는 바깥쪽을 향해 짖어대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감시견”에 비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윤리강령은 언론과 사회에 다 함께 중요한 기능을 한다. 미국의 고든(A. David Gordon) 교수는 윤리강령의 순기능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A. David Gordon & John Michael Kittross, ibid., pp. 61~64
      ① 언론사나 종사원이 자신의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② 윤리적인 행위를 향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③ 시민들에게 언론 행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의 기준을 제공한다.
      ④ 언론의 비윤리적 행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시민들의 부당한 요구로부터 언론을 보호한다.
      영국의 샌더스(Karen Sanders) 교수는 윤리강령의 기능을 다음의 4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Karen Sanders, ibid., p. 142
      ① 보호(protection): 독자나 시청자에게 뉴스의 정확성, 공정성, 불편부당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취재원비닉 의무를 통해 취재원을 보호하고, 프라이버시 보호 등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하라는 내부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② 교육(education): 언론의 핵심적인 가치와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언론인들 스스로에게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다.
      ③ 홍보(public relations): 언론인의 직업적 이상과 금기를 명확히 함으로써 대외적인 홍보 효과를 올릴 수 있다.
      ④ 손해의 최소화(damage limitation): 불필요한 임무 부여를 막을 수 있다.
      
      3) 윤리강령에 대한 시비
      위와 같이 윤리강령이 언론을 윤리적 언론(ethical journalism)으로 만들고 이로 인해 사회도 큰 덕을 본다는 주장에 대해 모두가 한가지로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윤리강령은 언론이 특권을 유지하고 위선을 감추기 위한 수사(修辭)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령에 규정되어 있는 특정 행위는 위축시키는 언론의 자유를 오히려 제한하는, 즉 자기검열(self censorship)을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또 너무나 자주 바뀌어 바뀐 내용을 그때그때 따라 잡을 수 없다고 불평을 한다. Richard Keeble, ibid., p. 13 참조.
      이러한 비난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일면적인 타당성은 있으나 윤리강령의 순기능을 부정하거나 상쇄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윤리강령의 명문화에 대한 시비와 강제규정의 부재에 대한 비판에는 주의를 기울일 만한 점이 있다.
      윤리강령의 명문화에 반대하는 쪽은 이를 명문화함으로써 자기검열을 강화한다는 점, 규정이 너무 막연해서 구체적인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윤리강령 위반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불리한 증거로 원용될 우려가 있다는 점, 몇몇 조문으로 마감에 쫓기는 실제 상황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Louis A. Day, ibib., p. 46 또한 반대론자들은 윤리강령이란 언론사에 쏠린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지못해 양보적 조치로 내놓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강령을 명문화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육감에 의해 판단해오던 관행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1997년 한국언론연구원의 기자의식조사와 1993년 AP가맹사 편집국장(APME) 대상 조사결과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조사에서는 윤리강령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가 32.6%였고 자기 회사가 강령을 제정했는지 여부도 모른다가 27%였다(『한국언론보고서』, 한국언론2000년위원회 2000, 87쪽). 미국 조사에서는 윤리강령집을 어디 둔 것까지 안다는 사람은 17,8%였고 문제가 있을 때 이를 참고한다는 사람은 불과 7,2%였다(콘라드 핑크, 전게서, 260쪽 참조).
      찬성하는 쪽은 언론윤리란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이를 개개인의 일시적 기분이나 자의적 해석에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성문화하는 것이야말로 이런 폐단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문화된 규정이 있어야 자신에게 무엇이 기대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1970년대 『로스앤젤리스 타임스』의 사내 옴부즈만 데이비드 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덕적인 헌신감 때문에 정직해지는 것이 아니고 지적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윤리적으로 된다.”고 말했다(유진 굿윈 저/우병동 역, 『언론윤리의 모색』, 한나래 1997, 29~30쪽).  모든 규범이 그렇듯이 명문화 되어 있을 때 훨씬 그 실천성이 높아진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윤리강령에 규정된 ‘고상한’ 행동을 스스로 다짐하고 대외적으로 약속함으로써 전문직업인(professional)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의사, 변호사, 변리사, 약사 등 모든 전문직의 윤리강령이 모두 명문화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Jay Black, Bob Steele & Ralph Barney. Doing Ethics in Journalism, Allyn and Bacon 1995, p. 13
      또한 윤리강령의 명문화는 언론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직업수행과 관련,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 추구하려는 최소한의 진지한 노력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한편 언론으로 하여금 자신들에 주어진 공공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 전 세계 언론계가 윤리강령을 명문화해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뉴욕 타임스』 블레어(Jason Blair) 기자의 기사날조 사건 등으로 신문의 신뢰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되자 2003년 6월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와 언론연구원(API)이 공동으로 31명의 주요 신문편집인들을 초치하여 가진 비공개 포럼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윤리강령의 제정에 의견을 같이했다(『Media Worldwide』 2003. 8월호, 47쪽).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언론윤리가 여론의 빈축을 사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중앙 언론사와 주요 언론단체들은 거의 다가 윤리강령을 갖추게 되었다.
      윤리강령에 강제규정이 없는 것도 윤리강령의 명문화를 반대하는 논리로 원용되고 있다.  강제규정이 없으니 다들 잘 지키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위반에 유효한 제재수단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는 윤리위원회를 두고 ‘이빨 없는 감시견’, ‘종이 호랑이’, ‘권총도 곤봉도 없는 경찰’ 등으로 조롱하기도 한다. 의사, 변호사, 간호사 등의 전문직 단체들의 윤리강령이 벌칙을 갖고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래서 한국언론2천년위원회는 윤리강령이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위반자에 책임을 묻는 벌칙이 엄격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언론인들조차도 24.8%가 기자들의 윤리의식 제고방안으로 법적 제재를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언론2천년위원회, 『한국언론보고서』, 2000, 90~92쪽  두 원로 언론인(남시욱, 성병욱)은 “윤리강령을 허위고백으로 만들고 말면 결국 타율규제를 부르는 꼴”이라고 경고하고 윤리강령 위반에 실효성 있는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율규제기구의 강화를 통해 강한 징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지운, 『글로벌 시대의 언론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224쪽
      그러나 한국,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나라들은 윤리강령에 제재규정이 없다. 어떤 형식의 제재도 언론에 대한 외부간섭이 될 수 있다 것이 그 이유이다.50) 미국 최대의 기자 조직인 직업저널리스트협회(SPJ)는 1980년대 중반 윤리강령 위반자에 대한 견책 조항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1987년 결국 넣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강령의 영예로운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기자들을 독려하고 강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Jay Black·Bob Steele·Ralph Barney, Doing Ethics in Journalsm, Allyn and Bacon 1995, p. 15). 윤리강령에 강제규정을 두지 않는 것은 자율규제라는 본래 취지의 훼손 우려와 제재에 의한 부작용(chilling effect)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 위반 및 결정사항을 대외적으로 공표함과 동시에 언론에 이를 실음으로써 이를 통한 여론의 압력에 기대하고 있다. 비록 강제성이 없는 여론을 통한 제재 방식이지만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지 Sun의 편집장 옐란드(David Yelland)조차도 “영국의 신문고정처리위(PCC)가 이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PCC는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파파라치에 의한 사생활 침해 보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Richard Keeble, ethics for Journalist, Routledge 2006, p.17). 개별 언론사가 윤리적인 언론을 통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강령에 벌칙이 있든 없든 위반자에 대해 휴직, 부서 이동, 심한 경우 면직 조치 등을 통해 강령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신문편집인협회(ASNE)가 226개 신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리규정 위반을 이유로 사원을 해고한 언론사가 48, 정직시킨 언론사가 30개사였다(핑크, 전게서, 261쪽). ASNE가 『뉴욕 타임스』 블레어 기자의 오보로 신문의 신뢰가 큰 위기를 맞았던 2003년 미국의 4백 여 신문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1%가 윤리강령을 새로 제정했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강령 위반 시 해고한다고 발표했다(『新聞硏究』(일본신문협회) 2005. 3월호, p. 91).  
      다행히 최근 많은 언론사들이 윤리강령 실천을 담보하기 위해 사내 윤리위원회를 두어 강령 위반자에 대한 징계를 회사에 건의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도 회원들의 윤리강령(2001. 11. 23 제정) 위반 시 각 언론사별 지부에 진상조사와 결과보고를 요구하는 한편 윤리위를 열어 징계와 함께 이를 『미디어오늘』 등에 공개하기로 했다. 전국언론노조는 2005년 1월 25일 ‘연예인 X파일’ 작성에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기자·리포터 10명이 소속된 언론사나 언론노조 각 지부에 진상조사와 문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 언론노조에 가입한 5명에 대해서는 소속노조 지부가 진상을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조사내용을 보고 받은 후 윤리위원회를 열어 징계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미디어오늘』 2005. 1. 26).

    4. 한국의 언론 윤리
      1) 언론인들의 인식
      윤리강령의 자율성 때문에 어느 나라나 윤리강령에 대한 언론인들의 인지도가 예상보다 높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특히 언론 피해자의 구제방법으로 언론중재위라는 한국 특유의 법정기구를 두고 있고 그 법정기구의 법적 효력 때문에 언론피해자들이 거의 대부분 중재위에 집중되고 있어 자연히 현 신문윤리위와 윤리강령에 대한 언론인들의 인식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언론재단의 김영욱 박사가 2004년 12월 신문기자 295명, 방송기자 104명을 대상으로 조사(『불만처리보고』, 한국신문윤리위원회 2006, 112~132쪽) 신문기자의 29%, 방송기자의 50%가 신문윤리강령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응답해 윤리강령에 대한 현직 언론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미미한가를 알 수 있다. ‘대충 읽어본 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고 응답한 신문기자 50%, 방송기자 39.3%까지 합치면 결과적으로 신문기자 80%, 방송기자 90% 가량이 신문윤리강령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조사는 또 신문윤리위의 활동에 대해서도 조사에 응답한 신문기자의 절반 이상(54.8%)이 신문윤리위의 활동 내용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응답자 중 38.7%는 강령 위반 시 내리는 조치 등에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고 6.5%는 자세히 안다는 응답을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결과는 신문기자 중 약 44%가 신문윤리위의 심의제도가 자신들의 윤리상황에 전혀 또는 거의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 점이다.
      언론인들의 신문윤리강령에 대한 이처럼 낮은 인지도에 비해 소속회사의 자체 윤리강령에 대한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소속회사와 관계에 있어 고용계약에 의한 복명의무 등 종속성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즉 신문기자의 약 26%가 자사의 윤리강령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읽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응답을 보였다. 자사 윤리강령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응답자(신문기자)가 19.4%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4명 중 3명은 자사 윤리강령이 있는데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2) 신문윤리위의 위상
       신문윤리위는 자체 심의실 보고사건과 제소사건 그리고 윤리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건을 심의·결정한다. 그러나 1978년부터 제소사건이 단 1 건도 없다. 피해자의 제소사건은 1965년의 36 건을 정점으로 현저한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1978년 이후부터는 단 1 건도 없다.  중재위 설립 이전부터 벌써 제소가 단 1 건도 없다는 것은 윤리위 기능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 부족 때문이거나 기대감의 감소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윤리위는 2004년 3월부터 그 산하에 독자불만처리위원을 두어 독자들로부터 윤리강령을 위반한 기사·광고에 대한 불만을 접수, 처리하고 있다. 이 역시 저조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2004~2006년 3년 간 불과 52건의 신문기사 불만을 접수하여 경고 9, 주의 24 등으로 처리했다.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것은 역시 ‘신문윤리강령’과 ‘신문광고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이다. 이를 위반한 경우 그 사안의 경중에 따라 주의, 경고, 공개경고, 정정, 사과, 관련자에 대한 윤리위의 경고 등을 결정할 수 있다. 윤리위은 이러한 결정 사항을 지상을 통해 공개하도록 할 수 있고 공개경고의 경우에는 2006년 12월 규정을 개정하여 신문협회 산하 전 회원사의 지면에 보도하게 하도록 했다. 위원회 결정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신문·통신사에 대해서는 기간단체에 그 회원자격을 정지 또는 제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운영규정 제9조1항8호).  
      종전에는 이러한 결정사항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 기간단체에 대한 자격정지·제명 요구가 고작이었으나 2006년 12월 규정을 고쳐 이 밖에 “같은 규정 위반으로 1년 동안(1. 1~12. 31) 3회 이상 경고를 받고도 시정하지 않는 경우 1천만 원 이하의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동 규정 제9조1항7호 신설). 한국과 같이 신문협회 등 언론단체(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 회원간의 연대감과 소속감이 미약한 현실 아래서 종전의 제재(단체 회원으로서의 자격정지·제명)로는 별로 실효성이 없어 규정을 다소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공개경고의 경우 전 신문에 이를 공개하도록 한 것은 제재가 강화된 면이 있으나 관련자에 대한 징계요구를 단순한 윤리위의 경고로 완화한 것은 후퇴한 느낌이다.
      제재 조항이 다소 강화되기는 했으나 윤리위에 대한 언론인들의 인식의 변화는 앞으로 이들 규정의 운영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종전 제재 조항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신문들은 제마다 지면 속에 윤리강령을 지키겠다고 버젓이 써 붙여 놓고는 예사로 이를 뭉개기가 일쑤였다. 한 예로 1997년 4월부터 1년 동안 같은 신문소설에 무려 24차례에 걸쳐 음란성이 짙다는 윤리위의 지적을 거듭 받고도 이를 시정하지 않은 신문사가 있었다. 최근에도 버지니아 공대 살인사건 범인 조승희의 잔인한 사진을 실었다고 경고를 받은 한 경제지는 같이 경고를 받은 27개 사와는 달리 경고를 받은 지 두 달이 넘도록 이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윤리위가 경고한지 넉 달이 넘은 9월 11일 현재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있다.
      신문윤리위의 위상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신문계의 무성의와 비협조에 기인한다. 윤리위를 만들고 윤리강령을 채택하고도 이를 어기는 것을 항다반사로 하고 제재를 받고도 무시하기 일쑤며 자율기구라고 하면서 예산을 스스로 조달하지 못하는 넌센스가 윤리위를 무력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2007년도 예산 6억4천만 원 가운데 2억 원만 신문협회에서 부담하고 나머지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결국 신문계의 이러한 무성의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언론중재제도로 하여금 이 땅에 발을 붙이게 하는 토양을 마련해주었고 신문 관련법제에 윤리적 규정을 줄줄이 불러들이는 명분을 마련해 주었다.

    5. 결론 및 제언
      우리 신문윤리강령은 전문에 “우리 언론인은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을 실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제1조에서 언론의 자유가 국민의 알 권리 실현을 위한 으뜸가는 권리라고 선언하고, 이어 제2조에서 사회의 건전한 여론 형성과 공공복지 증진, 문화 창달, 국민의 기본권 수호를 다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문윤리강령을 지킴으로써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거듭 천명하고 있다. 전문에서 선언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free and responsible press)’이야 말로 사회적 책임론을 주창한 허친스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으로 정착하려면 언론이 바깥세상의 돌아가는 얘기, 특히 권력의 움직임을 가감 없이 전함으로써 국민들의 공론장으로 역할한다는 믿음이 국민들 사이에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언론이 윤리적으로 통제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통제는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에 의해 자율적으로 수행될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강령과 윤리위의 기능은 결코 작지 않다. 김영욱, 앞의 글, 113~114, 129쪽 참조
      이와 관련하여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일본에 민주주의를 짧은 시간 안에 정착시키기 위해 취한 언론정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군정(GHQ) 당국은 1946년에 일본의 언론계를 대상으로 아래와 같은 3가지 주문을 내놓고 이를 강력히 밀어붙였다.
      ① 미국의 신문편집인협회(ASNE)와 같은 일본 언론인들의 독립된 단체를 만들 것.
      ② 이 단체가 주축이 되어 윤리강령을 만들 것.
      ③ 대학에 언론학과 설치 등 언론교육(journalism education)을 강화할 것. Seijiro Tskamoto, op. cit., pp. 58~59
      미국은 언론에 윤리강령과 윤리기구의 도입이 민주주의 조기 정착에 이보다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 없다고 본 것 같다. 그 결과 헌법이 공포(1947년 5월)되기도 전에, 즉 나라도 서기 거의 1년이나 앞서 신문윤리강령과 이를 관리할 언론인단체(일본신문협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신문협회는 스스로를 “신문윤리강령을 제정하고 실천하는 자주조직”이라고 밝히고 있다(http://pressnet.or.jp). 뿐만 아니고 일본 언론계는 미 군정의 건의에 따라 대학의 언론학과 창설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허친스 보고서(언론의 사회적 책임론)의 영향을 받아 언론법제연구위원회를 설치, 오늘에 이르고 있다. Seijiro Tskamoto, op. cit., pp. 60~61 일본신문협회 산하 법제연구위는 언론(취재, 보도)자유 신장을 위한 연구보고서를 이미 2 차례나 발간한 바 있고, 현재 제3차 연구보고서를 위해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언론에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 결국 입법을 통한 언론의 자유 제한의 형태로 될 것에 대비한 면이 강하다. 그 첫 보고서(1952년)도 ①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은 최소한으로 거쳐야 하고, ②언론은 스스로 최대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Seijiro Tskamoto, op. cit., p. 62). 참고로 일본신문협회에는 방송과 통신사도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한국의 언론계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 미흡한 점이 많다. 이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언론계가 자주적으로 만든 윤리기구(신문윤리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를 만든 언론계가 발 벗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율적인 언론규제기구(중재위)가 그 기능을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고 그것이 정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한국언론2천년위원회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만들었던 정신을 되살려 언론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모여 현행 윤리위원회 회칙에 규정되어 있는 약속을 엄격히 지키는 일을 하루 빨리 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한국언론2천년위원회, 전게서, 93쪽
      서구 사회의 언론평의회(press council), 고정처리위, 옴부즈만 등도 따지고 보면 한국의 중재위 같은 타율적인 규제기구의 탄생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면 우리 언론계도 침체된 윤리위의 기능을 더욱 활성화하도록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제소 사건이 거의 전무한 실정에서 윤리위 심의 사항의 양과 질의 결정에 절대적인 변수가 되는 윤리위의 심의실 인원이 실장을 포함하여 5명에 불과하다. 전국의 신문 보도, 광고를 모니터링하기에 5명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숫자이다.   민주정치에 언론이 갖는 특수한 기능이나 권력과의 관계에 있어 언론의 미묘한 위치 등을 감안하면 언론에 대한 윤리기구는 역시 자율성을 갖추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볼 때 윤리위야 말로 언론계가 스스로 뜻을 모아 자율적으로 만든 자주구제기관으로 언론 자유(Pressefreiheit)의 원리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언론계는 윤리위의 활성화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일로서는 재정지원의 확대, 제재 사항의 충실한 이행(조치사항 보도 등), 한국언론2천년위원회는 “신문사들이 윤리위원회 결정사항에 성의 있는 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앞 보고서 91쪽). 사원들의 윤리교육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뉴욕 타임스』 블레어 기자의 기사 날조사건의 진상조사와 대책 마련을 위해 설치된 팀의 시걸(Al Siegel) 위원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만일 언론계가 교육받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문화를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소득”이라고 말했다(『Media Worldwide』 2003. 12월호, 13쪽).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신문』도 2005년 사내에 저널리스트 학교를 설치, 신입기자는 물론이고 지방 주개 기자와 중견기자(입사 10년차 내외)를 상대로 윤리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언론 지망생과 사회인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Media Worldwide』 2006. 12월호, 74~79쪽). 실제로 세계적인 명문지 『뉴욕 타임스』가 블레어 기자의 날조 기사로 152년의 역사에 일대 오점을 남겼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도 바로 사원들의 윤리교육 강화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위 시걸 위원회는 블레어 사건의 대책으로 기자들의 저널리즘 윤리 문제를 전담하는 스탠더드 에디터(standard editor)의 신설을 건의하고 ①신규사원은 하루 교육일정의 절반을 윤리교육을 받고 회사 윤리강령을 지키겠다고 서명해야 하며, ②기존 기자들도 모두 매년 가설 사례에 기초한 윤리 재학습 과정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했다(『왜 우리의 저널리즘은 실패했나』, 한국언론재단 2003, 29~30, 54~55쪽).
      그래야만 윤리위가 진정한 자율적 규제기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컨대 언론피해구제법(제32조1항)이 다분히 윤리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 일들과 관련하여 중재위에 언론사에 대한 시정권고권을 주고 있고 신문법 등에 윤리적 사항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대한 그 타당 근거를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옥조, 『미디어법 개정판』,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637~638쪽 참조
      기자 등 언론종사자들도 스스로 만든 신문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을 숙지하고 이를 준수함으로써 전문직업인으로서 긍지를 되찾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굳건히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언론을 평가할 때 보도의 결과만 보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취재 과정도 주요한 평가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법하거나 비윤리적인 취재로 얻은 보도는 그 한 번으로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정보의 샘의 원천부터 말라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실천요강의 소상한 규정이 바로 기자들이 갖추어야 할 이러한 덕목을 모아놓은 것이다.
      언론이 우리에게 진실을 전할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언론은 하루도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신뢰의 감소는 언론의 존립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언론이 한 축이 되어 유지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지게 한다. 지금 우리 언론도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진통의 한복판에는 언론에 대한 불신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불신을 털어버리는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언론이 더욱 윤리적으로 되는 길이다. 한국언론재단 수석연구원 김영욱 박사는 “언론윤리는 더 좋은 언론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언론이 언론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말했다(앞의 글, 129쪽).
      끝으로 언론의 질에 대한 언급한 영국의 철학자 존 매함의 말(1990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언론의 질이라 함은 그들이 전한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을 전하는 윤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 아닌지에 의해 판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은 항상 진실을 전한다는 원칙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한 원칙이 서 있을 때 비로소 풍요로운 언론문화가 구축되는 것이다.” 新聞報道硏究會 編, 전게서, p. 325 재인용